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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주로를 달리며 preview0437 2018. 10. 1.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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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 안에 있는 것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특유의 새하얀과 함께 멎어 있었다. 폐의 일부를 도려내고 누워 있는 남편과 그를 지켜보는 아내의 얼굴. 창가로 스며들다 간 젊음. 그걸 깨부수는 모든 종류는 이단이라 여겼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면.
호석은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침대 위에 고정시킨 채 매일 밤마다 귓속의 감각기관을 운행했다. 혼자서라도 멎지 않기 위해서였다. 활기를 갉아먹으려는 수마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제 새까만 색을 풀고, 눈꺼풀을 끌어내렸다.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아득하게 하고 마침내 나를 끝내려는 시험 같았다. 똑 딱 똑 딱.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계가 내달린다. 긴 다리와 짧은 다리를 번갈아가며 똑 딱 똑 딱, 이곳에서 유일하게 멎지 않은 것의 면모를 뽐내고 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호석에게는 그것만이 최후의 수면을 밀어내고 살아 있음을 증명할 유일한 수단이었다. 잠들면 죽는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때는 왜인지 그렇게 느꼈다. 잠들면 죽는다……. 그러니 시계를 떼지 마세요. 난 멎고 싶지 않아. 그러나 호석은 현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처지다. 경추를 다쳐 꼼짝할 수 없는 환자의 속마음 따위는 누구도 들을 수 없다. 해서 시계는 떼어졌다. 더 이상 질주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병동은 완벽한 적막을 맞이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이제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벽 대신 자신의 손목을 흘끔거렸다. 아무도 달리지 않는다. 호석도 그렇게 멈춰가는 듯했으나 갑자기 신호탄을 쏘듯 번쩍 손가락이 움직여졌다.
호석이 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 뚜껑을 땄다. 멸균이 잘 된 숟가락으로 이리저리 휘젓다 입에 넣으면 말캉하게 씹히는 묵음이 아닌 후릅거리는 소리가 났다. 또 다시 적막을 깨부수는 소음. 그래도 기다렸다는 듯 퍼먹었다. 티 내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 소리에 신경을 붓고 있었다. 아마 이 식사가 끝나면 아이스크림이 낙사한 쓰레기통을 이글이글 노려볼지도 몰랐다. 그래도 기쁘게 퍼먹었다. 호석은 살고 싶었다. 첫 번째는 손가락, 그 다음은 발가락. 하루하루 움직일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갈수록 그 시계처럼 숨 가쁘게 달렸다. 삶에 대한 의지를 표출하는 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의사는 성년이 된 호석에게 드디어 해방을 선고했다. 그곳에서 정체되지 않은 것들만이 얻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
이 년 만에 돌아온 학교에 친구들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들 사회로 방생되어 적당히 방황하고 적당히 무언가를 잃어 가는 중이었다. 그들이 왜 열여덟로 돌아간 자신을 부러워하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호석은 고개를 수그려 몸에서 물처럼 팔랑거리는 교복을 내려다봤다. 몰랐는데 살이 홀쭉하게 내려 있었다. 병동에서 죽은 듯 누워 있기만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담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니. 눈에서 어른의 몸으로 교복을 갖춰 입은 제자에 대한 낯선 적대 같은 것이 느껴졌다. 호석이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에 놓인 사각 거울로 시선을 처박았다. 왜 나를 어른으로 대하는 걸까? 너무 의미 없게 지나가 기시감조차 없는 과거지만 억울함을 터뜨릴 기운도 없었다. 현실은 병동보다 더 차갑게 멎어 있다. 스무 살의 복학은 발에 맞지 않는 신발 같은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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